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수궁 함녕전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덕수궁]]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(慶運宮)이다. 본래 [[성종(조선)|성종]]의 [[형]] [[월산대군]]의 [[집]]이었다가 [[임진왜란]] 당시 [[선조(조선)|선조]]가 잠시 머물던 [[궁전|행궁]]이었다. 그나마도 [[인조]] 이후엔 [[덕수궁 즉조당|즉조당]]과 부속 건물 몇 채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 [[건물]]들을 전부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면서 약 270년 간 비었다. 그러다 1896년([[건양]] 원년) [[아관파천|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]]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이 환궁할 곳으로 경운궁을 택하여, 경운궁을 제대로 된 [[궁궐]]로 만드는 공사를 시행했다. 이 때 [[임금]]의 정식 침전으로 지은 것이 함녕전이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1897년 함녕전.png|width=100%]]}}}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임인진연의궤 - 함녕전도.png|width=100%]]}}} || || {{{#683235 '''1897년 완공 직후의 함녕전'''}}} || {{{#683235 '''《임인진연의궤》[* '임인진연'은 '임인년(1902년)의 궁중 잔치'란 뜻이다. 이 연회는 고종이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열렸다.]에서 나타나는 1902년 경의 함녕전 그림'''}}} || 이 때 지은 [[건물]]들은 대부분 신축이었으나, [[국가]] [[재정]] 상황 때문에 [[경복궁]]의 [[전각]]을 옮겨온 것도 많았다. 함녕전이 그런 경우로, 경복궁의 만화당(萬和堂)을 옮겨 지었다.[* 경복궁 북동쪽의 대비전의 별당 건물로 추정된다.] [[황제]]의 침전인만큼 빨리 공사를 시작했지만, 1897년([[건양]] 2년) 2월에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이 환궁한 후에도 완공을 못하여 고종은 한동안 [[덕수궁 석어당|석어당]]에서 머물렀다.[* [[덕수궁 즉조당|즉조당]]에서 머물렀단 이야기도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. 사실 환궁 전 신하들이 권유하긴 했으나, 즉조당은 거처로 삼기엔 너무 좁았으며 무엇보다 [[경복궁 선원전]]에서 옮겨온 [[어진]]들을 임시로 모셨기 때문에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이 거절했다.[[https://blog.naver.com/minsu977/221256780196|#]]] 그 해 6월, 함녕전의 상량문 제술관이 임명되었으며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za_13406019_002|#]] 함녕전에서 [[신하|신료]]들을 접견한 것으로 보아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za_13409030_001|#]] 대략 7월에서 8월 경에 공사가 끝난 듯 하다. 완공 이후 고종은 함녕전을 자신의 주 처소로 삼았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함녕전 의궤.png|width=100%]]}}} || || {{{#683235 '''《경운궁중건도감의궤》의 함녕전 모습[* [[https://www.gogung.go.kr/ancientBooksView.do?bbsSeq=6157&bizDiv=2|사진 출처 - 국립고궁박물관.]]]'''}}} || 1904년([[광무]] 8년) 4월에 함녕전의 [[온돌]] [[수리]] [[공사]]를 하고 [[아궁이]]에서 불을 때다 대화재가 일어났다. [[경운궁]] 주요 전각이 불 타 사라졌고 화재의 발원지였던 함녕전도 당연히(...) 잿더미로 변했다. 그해 12월에 바로 복구 공사에 들어가 2년 뒤인 1906년(광무 10년)에 재건했다. 이 때 기존의 함녕전과 약간 모습이 달라졌다. 함녕전 서쪽에 위치했던 행각을 [[담|담장]]으로 바꾸고, 서북쪽에 온돌방 4칸을 추가로 지었다. 함녕전이 소실된 이후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은 [[덕수궁 중명전|중명전]]을 집무실 겸 침전으로 사용했다. 그러나 1906년([[광무]] 10년)에 다시 지었어도 그 무렵 있었던 여러 [[헤이그 특사|역]][[정미 7조약|사]][[대한제국 군대 해산|적]] [[기유각서|격]][[경술국치|변]]때문에 함녕전으로 돌아갈 시기를 놓치고[* 그 유명한 [[을사조약]]이 바로 [[덕수궁 중명전|중명전]]에서 체결되었다.] 계속 중명전에서 거주했다. 1907년([[융희]] 원년)에 [[순종(대한제국)|순종]]이 [[황제]]로 즉위하고 함녕전에 잠시 머물긴 했지만, 얼마 안있어 [[창덕궁]]으로 이어했다.[* 移御. 임금이 이사가다.] 결국 고종이 공식적으로 아주 돌아온 것은 [[경술국치|이미 국권을 뺏긴 후인]] 1912년 10월이었다. 이후 이왕직[* 李王職.]에서 고종의 편의를 봐준답시고 행각들에다 대기실, 사무실을 설치하는 등 주변 모습을 많이 바꾸었다.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[[죽음|승하]]한 후 함녕전을 빈전과 혼전[* 혼전(魂殿): 임금과 왕비 신위를 임시로 봉안하던 곳. 빈전(殯殿):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.]으로 사용했고 이후 전호(殿號)를 효덕(孝德)으로 정하여 약 1년 간 함녕전을 '효덕전(孝德殿)'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. 이후 주인없이 건물은 비었고, 1938년 일제의 [[덕수궁]] [[공원|공원화]] 계획으로 [[관광지]]로 변했다. 2009년 [[문화재청]]에서 일제가 변형한 행각을 [[복원]]했고 2019년에는 정문 [[광명문]]을 원 위치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